삼생삼세 십리도화 /당칠공자 저/ 문현선 역/ 문학동네 출판
1. 들어가기 전
삼생삼세 십리도화의 세계
삼생 상세 십리도화에는 중국 고서 [산해경]과 도교, 불교, 중국 고대 전설과 시환의 세계관이 혼합되어 있다. 부신 夫神 과 모신 母神이 세상을 만들고 이후 혼돈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만들어진 세상은 인간계와 신선계로 나뉘어 있는데, 사해팔황으로 구분되는 신선계에는 구중천의 천족, 봉황족, 호족의 일가만이 존귀한 신분으로 남아 있다.
삼생삼세
삼생삼세는 불교에서 전생, 현생, 내생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삼생삼세 십리도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영원에 가까운 삶을 영위하는 신선이기에 그들에게 '삼생삼세', 즉 세 번의 삶이란 죽음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겁 劫이나 봉인에 의해 결정되는 다른 형태의 삶을 의미한다.
신선의 품계
신선 神仙 - > 상선 上仙 - > 상신 上神
보통 신선은 수행을 통해 상선이 된 다음, 상신이 된다. 상신이 되려면 짧게는 칠만 년, 길게는 십사만 년이 걸리며 두 차례의 겁운을 겪여야 한다. 겁운을 잘 넘기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만 넘기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백천이 사음의 신분이었을 때는 상선이었고, 이후 상신이 되기 위해 속인 소소의 몸으로 주선대에서 뛰어내리는 겁운을 겪었다. 백천 외에 절안, 묵연 등이 상신의 지위에 있다.
프롤로그 1.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요즘 들어 그녀는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기 힘들었다.
"뱃속의 황자 아기씨 때문에 피곤하셔서 그럴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마마."
그녀를 돌봐주는 시녀 내내가 말했다. 내내는 구중천 세오궁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보고 살갑게 웃으며 '마마'라 부르는 선녀였다.
(중략)
내내가 창문을 열자 살랑거리는 바람에 발걸음 소리가 실려왔다. 내내가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태자 저하께서 오셨어요."
그녀가 나무인형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침대 난간에 기대앉았다. 얼마나 잤는지 몰라도 머리가 그다지 맑지 못했다. 방금 전에 깼는데도 견딜 수 없게 피곤했다.
흑발에 검은 옷을 입은 태자 야화가 이불을 살짝 누르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중략)
"당신과 성혼하여 당신 눈이 되어주겠소."
소소, 당신 눈이 되어주겠소.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살짝 차갑긴 해도 충분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순간적으로 칼날이 심장을 푹 하고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그날 밤의 악몽이 다시 한번 생생하게 되살아나 그녀는 두려움에 몸을 떨며 야화를 밀쳐냈다.
(중략)
한때 그토록 그리워하고 절절하게 원했던 이, 그가 이제는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때때로 정말 궁금했다. 야화는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애당초 왜 그런 황당한 요구를 받아들인 것일까.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한참 뒤 발소리가 났다. 야화가 떠났다. 내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녀는 이불을 안은 채 몸이 더 이상 떨리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무겁게 침대에 누웠다. 머릿속은 엉망으로 뒤엉켜 동황의 준질산이 떠올랐다가 야화의 얼굴이 떠오르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비수와 도려내진 자신의 두 눈이 떠올랐다.
그녀는 몽롱한 상태로 생각에 잠겼다. 뱃속의 아이만 낳으면 준질산으로 돌아가리라. 그곳이야말로 내가 속한 곳이고 이 끔찍한 사랑이 시작된 곳이니 끝내야 한다. 최대한 빨리.
(중략)
꿈에서 그녀는 처음 야화를 만났던 삼 년 전, 준질산으로 되돌아갔다.
검은 옷을 입은 흑발의 준수한 청년이 손에 검을 쥔 채 피투성이의 몸으로 그녀의 초가 앞에 쓰러져 있었다.
청년은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감사하며 꼭 보답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별거 아니라고, 약초만 약간 썼을 뿐이라 은혜랄 것도 없다고 했지만 청년은 한사코 고집을 부렸다. 그럼 금산이나 은산을 내놓으라고 하자 청년이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씨는 제 목숨을 하찮게 생각하시는군요." 세상에 생명의 은인 치고 그녀처럼 난감한 경우가 또 있을까. 그녀는 귀찮고 답답한 나머지 두 손 두발을 모두 드는 심정으로 "그럼 몸으로 갚으시든가요."라고 말했다. 청년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그 황당한 대답 이후 둘은 정말로 결혼하게 됐고 그녀는 임신까지 했다.
(중략)
나중에 청년이 구중천으로 데려왔을 때에야 그녀는 청년이 천군 天君의 손자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그는 태자로 책봉되기 전이었다.
(중략)
어느 밤 그녀가 탕국을 만들어 청년의 침소로 갔을 때 문밖을 지키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소금 천비의 애절한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내가 당신을 버리고 천군께 시집갔기 때문에 속인을 아내로 얻은 것 아닌가요? 하지만 내게 무슨 방법이 있었겠어요? 사해팔황(세상을 가리키는 말로 동해, 서해, 남해, 북해와 동황, 서황, 남황, 북황, 동남황, 동북황, 서남황, 서북황의 통칭)의 어느 여자가 천군의 은총을 거부할 수 있죠? 말해봐요. 야화, 아직도 날 사랑하죠? 그 여자의 소소라는 이름도 내 이름에서 따온 거잖아요. 그렇죠?"
(중략)
사실 그때 동황의 준질산에서, 야화가 마음에 품은 이가 있다고 얘기했더라면 이렇게 터무니없는 이유로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야화를 사랑하지 않았다. 깊은 산속에서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 보니 너무 외로웠을 뿐이다.
(중략)
그녀는 완전히 깨달았다.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를 증오해본 적이 있는가.
그 일은 결국 야화와 소금 사이의 애증 문제였고 그녀는 지나가다 애매하게 끼어든 과객에 불과했다. 모든 것이 정해진 액운이었다.
(중략)
그녀가 주선대에서 몸을 날렸다. 휭 하는 바람 소리 속에서 긴 탄식이 나부꼈다. 야화, 더 이상 당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이게 좋아요.
그때, 그녀는 주선대가 신선의 신력을 없애는 곳임을 알지 못했다. 속인이 주선대에서 떨어지면 그대로 흔적 없이 소멸된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때, 자신이 실은 속인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주선대 아래의 포악한 기운이 그녀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하지만 천만 대군에 필적할 정도로 엄청난 그 기운이 그녀 이마의 봉인 또한 풀었다. 자신의 이마에 붉은 점이 이백 년 전 동황의 종을 부수고 나온 귀군 鬼君 경창을 다시 가두기 위해 벌인 전투에서 경창에게 찍혀 생긴 봉인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전혀 몰랐다. 봉인은 그녀의 용모와 기억, 신선의 기운을 모두 없애고 그녀를 속인으로 만들었다.
(중략)
"백천, 너는 원래 신선이었어. 수행할 필요 없는 여신. 하지만 세상천지에 쉽기만 한 일이 어디 있나. 겁운 劫運을 겪지 않고 어떻게 상신에 오를 수 있겠어. 이번에 겪은 수십 년짜리 애증과 원한도 한바탕 겁운에 지나지 않는 거야."
(중략)
한바탕 업보를 겪은 것뿐이었다.
그녀가 웃으면서 절안에게 물었다. "잊고 싶은 일을 완전히 지워주는 약을 가지고 계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죠?"
(중략)
탕약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녀는 단숨에 탕약을 마셨다. 이제 준질산의 소소는 사라졌다. 그것은 청구국 백지제군의 딸 백천 상신이 꾸었던 꿈, 한없는 괴로움과 약간의 분홍빛을 띤 꿈에 불과했다.
꿈에서 깬 뒤 백천은 무슨 꿈을 꾸었는지 깨끗이 잊어버렸다.
프롤로그 2. 청구의 백천
삼백 년 후.
동해수군이 새로 얻은 아들의 만 한 달 잔치를 준비하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며칠 연속 능소전 조회에 불참했다. 하지만 천군은 모르는 척 계속 내버려 두었다.
(중략)
오만 년 전, 백천은 천군의 둘째 황자인 상적과 정혼했었다. 대등한 집안끼리의 잘 어울리는 혼사였는데 갑자기 상적이 백천의 시녀에게 반해 죽어도 백천과 혼인할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웠다.
백지제군은 모욕이라고 펄펄 뛰면서 절안 상신과 구중천으로 찾아가 철군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천군은 격노하여 둘째 황자를 북쪽에 유배시키고 북해 수군으로 강등했다. 또한 차기 천제는 백천을 황후로 맞이해야 한다는 조서를 천족의 명의로 발표했다.
그리고 삼백여 년 전, 천군은 장손 야화를 차기 천제로 봉한다는 조서를 사해팔황에 내렸다.
구충전의 신선들은 머지않아 야화와 백천의 혼인식이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삼백 년 동안 둘의 혼인에 관한 소식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중략)
신선들은 조심스럽게 탄식한 뒤 동해수군이 운수 대통했다며 부러워했다. 몇 만년 동안 청구를 나온 적이 없는 고모가 동해수군의 초대에 응했으니 실로 면이 설 만했다.
남두진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본디 체면이 서는 일인데 지금 동해수군은 걱정이 한가득입니다. 고모님이 초청에 응하시리라고는 예상 못했기 때문에 그에 앞서 북해수군도 초청했거든요. 심지어 며칠 전에 들으니, 야화군이 천손을 데리고 동황에 놀러 왔다며 그 김에 동해에 들러 축하하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셋이 잔치에서 부딪힐 수밖에는 없는 상황이지요. 혹시라도 무슨 사달이 날까 봐 동해수군이 얼마나 걱정하는 모릅니다."
2. 줄거리
백천은 호족 백지제군의 막내딸로 선계 유일의 여 女 상신이므로, 고귀한 신분과 높은 품계를 갖춘 여신입니다. 따라서 선계에서 그녀의 지위는 천족의 왕, 천군과 대등할 정도입니다.
그런 백천이 오랜 은거를 깨고 동해수군의 아들 만월연에 참석합니다. 하지만 찹쌀경단을 닮은 동자를 만나면서 일이 꼬입니다.
찹쌀경단은 그녀를 보자마자 어머니라고 부르며 찰싹 달라서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곧이어 아이 아버지가 나타나 아이를 떼어놓는데 그의 얼굴에 백천은 잠시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그것은 아이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서로 다른 의미였죠. 백천은 그 남자가 자신의 옛 스승 묵연을 많이 닮아서고 남자는 그녀가 자신의 옛 아내 소소를 많이 닮아서 순간 소스라칩니다.
아니다! 서로 그 사실을 인지하고 깍듯이 인사하며 헤어지는데, 마침 백천을 기다렸던 소신에 의해 그녀의 신분이 드러납니다. 그 외 다른 사실도 알게 됩니다.
소신은 백천의 하녀로, 선계에서 백천의 얼굴을 아는 소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천군의 둘째 아들이자 백천의 정혼자였던 상적이 호리동에 왔다가 소신의 미모에 첫눈에 반해서 결국 파혼을 선언하고 소신과 결혼하면서, 결과적으로 상적은 북해수군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구중천에서 쫓겨나고 백천은 세상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일생일대의 수모를 당합니다. 정작 본인은 개의치 않았지만 백지제군과 절안 상신이 천군에게 항의를 하는 바람에 차기 천군의 정비로 정해집니다.
삼백 년 전, 천군의 손자 야화군이 태자로 봉해짐에 따라, 그녀의 정혼자로 야화군이 확정된 상태였습니다만 야화는 야화대로, 백천은 백천대로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정작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야화는 소소를 닮은 그 여인이 천군께서 친히 정한 자신의 정혼자 백천이자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맨 '소소'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이, 백천 역시 동해수군에 의해 찹쌀경단의 아비가 천족의 태자 야화군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백천은 동해수군에게 자신을 절안의 시녀라고 속이고 선물을 건네고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찹쌀경단이 아닌 그 아버지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야화는 야화대로, 그의 아들 아리는 아리대로 백천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어서 도망치듯 동해를 벗어나지만 그녀가 가진 가장 큰 약점은 엄청난 길치라는 것입니다.
막상 그녀가 자신의 고향 청구에 도착하자 이미 야화 부자가 호리동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리동의 수호자 미곡도 백천의 정혼자이자 천족의 태자와 천손을 쫓아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죠.
그녀라고 별 수 없죠. 야화와 아리에게 호리동에서 머물 방을 내주고 때를 봐서 야화에게 진지하게 파혼하자고 말합니다. 그때 야화의 눈길에는 분노의 빛이 일렁거리죠.
백천은 자신보다 9만 살이나 어린 남편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그에게 더 젊고 더 예쁜 아가씨를 신부로 맞으라고 꼬드겨 보지만 오히려 야화의 감정만 상하게 하죠.
백천은 그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아리의 생모였던 소소를 닮아서라고 생각합니다만 야화의 절절한 눈빛이 자신을 향하는 것에 가슴이 뜨끔합니다.
사실 그녀는 이뤄야 할 과업이 있습니다. 첫째 스승인 묵연 상신의 선체를 부활할 때까지 돌보는 것, 둘째 귀군 경창이 봉인된 동황종을 감시하는 것입니다.
묵연 상신은 7만 년 전 귀족의 왕, 경창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경창이 패전의 위기에 처하자 최후의 수단인 동황종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동황종은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때까지 멈추지 않는 법기입니다. 묵연 상신은 부신의 유일한 적자로, 자신의 강력한 원신을 이용해 동황종을 경창과 함께 봉인시키지만 그때 원신이 소멸하면서 최후를 맞습니다.
당시 묵연의 열일곱 번째 제자 사음은 스승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스승의 신체를 훔쳐서 달아납니다. 바로 백천이죠. 그 후 7만 년간 백천은 자신의 심장에서 피를 뽑아 스승에게 먹여서 그 선체를 보존해왔습니다.
그 비밀이 야화에게 들키게 된 것은 귀군 이경의 왕후 현녀 때문입니다. 현녀는 백천의 둘째 올케의 여동생입니다. 어릴 때 현녀가 백천의 얼굴을 너무 닮고 싶어 해서 절안 상신에게 부탁해서 현녀의 얼굴을 자신과 똑같이 만들었습니다. 그 후 현녀와 만날 일은 없었으나 백천이 남자로 변장해서 묵연의 열일곱 번째 제자 사음이 되었을 때 둘째 올케의 부탁을 받아서 현녀를 보호하게 되었습니다. 그즈음 사음은 귀군 경창의 둘째 아들 이경과 사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녀가 둘 사이에 끼어들면서 사음은 이경으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그때 실연의 아픔을 혹독하게 치르고 있던 그녀를 위로해주고 도닥거려준 분이 바로 스승 묵연이었습니다.
묵연 상신은 부자의 적자이자 전쟁의 신으로, 천족 중 천군 다음으로 높은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소 자애롭고 인자하며 따뜻한 스승이었습니다. 특히 개구쟁이처럼 놀기 좋아하고 술 좋아하며 공부는 맹탕이었던 막내 제자를 특히 총애했습니다. 얼마나 총애했는지 묵연을 짝사랑했던 요광 상신(여신)이 질투해서 사음을 납치했고 그 일로 묵연은 오랫 벗이었던 요광과 절연했습니다.
한편 현녀는 백천을 닮은 자신의 얼굴을 이용해서, 백천인양 미곡을 속여 염화동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묵연 상신의 몸을 훔쳐 내고 천손 아리까지 데리고 청구를 떠납니다.
현녀는 죽은 아들의 혼을 묵연 상신의 몸으로 옮겨서 되살리려는 속셈이었죠. 그러나 백천이 대자명궁으로 바로 쳐들어와서 계획이 틀어집니다. 게다가 귀군과 태자가 동시에 나타나는 바람에 현녀는 더욱 위기에 몰리고 말죠. 다행히 태자는 현녀에 대한 처분을 남편인 귀군에게 맡기지만 백천은 현녀에게서 예전에 자신이 주었던 얼굴을 도로 가져갑니다. 그러자 현녀는 백천의 얼굴이 아닌 자신 본래의 얼굴을 부정하며 두 눈을 뽑아버리죠.
진작 얼굴을 주지 않았더라면 이경을 현녀에게 빼앗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귀족의 난 때 현녀가 시아버지 경창을 도와 곤륜허에서 천족의 진법도를 훔쳐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전쟁도 그렇게 큰 희생자를 낳지 않았을 것이며 어쩌면 묵연도 가뿐히 경창을 무찌르고 전승했을지도 모릅니다.
백천은 야화의 도움으로 스승과 아리를 구해서 청구로 돌아오지만 야화와는 서먹해지죠. 그러나 야화는 이미 무슨 일이든 그녀의 편에 서기로 마음먹은 이상, 묵연 상신에 관해서는 일절 함구합니다. 그 대신 백천이 대자명궁에서 귀족 군사들과 전투를 벌여서 생긴 상처가 낫도록 구중천의 온천으로 데려갑니다.
묵연과 닮아서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도 들고 공연히 묵연 상신에게 질투도 느끼지만...
야화는 소소를 어이없이 잃었던 삼백 년의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 백천으로 사는 그녀를 지켜보는 하루하루가 행복해서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측비 소금이 이따금 계략을 꾸미는 것을 백천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서 서운할 뿐이죠.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애정이 있다면 질투 좀 해줄 텐데, 오히려 백천은 소금 외에도 다른 후궁을 두어도 된다고 통 크게 선심까지 쓰니 ,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런 야화의 마음을 백천이 알기는 할련지, 오히려 측비인 소금이 더 잘 간파하고 있어서 골치입니다.
소금은 백천에게 공공연하게 소소를 닮아서 야화가 좋아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며 예전에 소소와의 사이를 이간질했듯 백천과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야화가 자신을 여인으로 봐주길 바라면서 열심히 백천을 괴롭히죠. 그러나 야화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던 소금에게 단 한 번도 관심을 둔 적이 없습니다. 그는 누구라도 자신에게 달라붙는 것을 질색하는 철벽남 그 자체였습니다. 소금이 아니라도 누구든 무관심했을 남자입니다.
소소를 만나지 않고 백천을 만나더라면, 백천이 파혼하자는 제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야화의 정신세계는 무색무취의 세계처럼 고요하고 평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소소를 만나고 그녀를 잃음으로써 그 세계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다시 재생하기까지 삼백 년, 아니 겉모습만 가까스로 유지할 뿐이었습니다.
비록 백천은 소소였을 때의 기억을 전부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하나하나 다 기억하는 까닭에 백천이 소소라는 사실을 아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세계에 빛이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색무취의 고요한 세계가 아니라 환희와 열정으로 들썩거리는 세계로 바뀌었습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겨우 셋째 숙부... 그리고 의외의 인물 절안 상신이 있었습니다.
십리도림의 주인이자 봉황족 상신인 절안은 묵연과는 형제와도 같은 사이여서, 묵연을 닮은 야화에게 자연 흥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소소를 잃고 참담한 모습으로 다 죽어가던 야화를 치료해서 겨우 살려 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십리도림에 만신창이로 쓰러져 있는 백천을 발견해서 그녀를 치료해주고 기억을 잊는 약까지 지어 줍니다. 즉 절안은 야화와 백천의 인연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안은 백지제군 부부와 그들의 자식들을 더 사랑해서, 백천이 소소로서 겪은 정겁을 기억에서 지우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도왔습니다. 그것이 야화에게는 지옥 같은 세월이었음을 알았지만 뭐, 인연이 있다면 만날 것이고 없으면 그만일 테니까, 각자의 운명에 맡겼던 것이죠.
다행히 백천이 야화를 점점 좋아해 하는 것을 보며 아빠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절안은 백천에게 놀라운 사실을 전합니다. 그것이 또 파란을 가져오고 야화를 죽도록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다음 자료는 핀터레스트에서 퍼온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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